건물 재건축으로 철거 위기 처한 1970년대 민중미술 대작 서명 참여 1만 명 돌파…
8월 3일 ‘무사 해체 기원제’ 열고 안전 이전 다짐
서울 광진구 구의동의 한 옛 은행 건물 가벽 뒤에 50여 년간 숨겨져 있던 한국 현대미술의 소중한 유산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건물 재건축으로 작품이 영구히 사라질 위기에 놓이자 이를 지키기 위해 시민들과 미술계가 직접 나섰다.
지난 8월 3일 구의동 옛 우리은행 건물에서 ‘오윤 구의동 테라코타 무사해체 기원제’가 열렸다. 건물 철거를 앞두고 열린 이날 행사에는 작가의 유족과 보존추진위원회, 한국민족미술인협회, 미술계 관계자, 시민 등이 참석해 한국 현대미술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훼손 없이 안전하게 해체 이전되기를 함께 기원했다.

[사진] 한국민족미술인협회를 대표해 두시영 아리랑 화가의 메시지를 대독하고 있다.
가벽 뒤에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오윤의 공공미술
이번에 보존 운동이 시작된 작품은 한국 민중미술의 거장 고(故) 오윤(1946~1986) 작가가 28세였던 1974년, 동료 작가 오경환·윤광주와 함께 노동자들과 흙을 빚어 구워 만든 대형 테라코타 부조 벽화다. 당시 은행 건물 내벽에 설치된 이 작품은 한국 공공미술 초기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받는다.
오윤 작가는 노동자의 삶과 도시의 일상을 흙빛 부조에 담아내며 “미술은 특권층이 아닌 많은 사람이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해 온 작가다. 민중미술사와 공공미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이 작품은 최근 건물 매각과 재건축이 결정되면서 자칫 건축 폐기물로 처리돼 영구히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먼저 살려내고 다시 시민의 품으로!
시민과 미술계가 시작한 보존 운동건물 철거가 예정된 8월 안에 작품을 해체하지 못하면 벽화는 영구히 훼손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공공기관의 예산 지원이나 행정 절차를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시민들과 미술계는 ‘오윤 구의동 테라코타 보존추진위원회’를 꾸리고 직접 보존 운동에 나섰다.
작품 보존을 촉구하는 시민 서명운동에는 당초 목표였던 1만 명을 넘어 높은 사회적 관심을 보여줬다. 서울 종로구 관훈갤러리에서는 전국 100여 명의 작가들이 작품을 기증해 보존기금 마련 전시를 이어가고 있으며, 예술인 플랫폼 ‘씨앗페’에서 진행 중인 크라우드펀딩 모금액도 8월 3일 기준 4,700만 원을 넘어섰다.
이번 기원제 행사에 참석한 미술인은 이번 보존 운동이 단순히 한 점의 작품을 살리는 데 그치지 않고,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인 문화유산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모델이 되기를 기대했다.
이날 서인형 보존추진위원회 운영위원장은 그간의 추진 경과를 설명하며 “협의 과정에서는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생기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을 온전히 지켜 다음 세대에 전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공공기관 등 행정 협의만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며 “우선 시민과 미술계가 힘을 모아 작품을 안전하게 해체한 뒤, 향후 공공기관 등으로 이전·보존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밝혔다.

[사진] 서인형 보존추진위원회 운영위원장의 경과보고 모습
작가의 차남 오상엽 씨는 “아버님께서는 생전에 미술은 많은 사람이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계셨다”며 “이 작품 역시 시민 모두가 함께 누리는 공공의 자산으로 보존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오윤의 테라코타 벽화가 무사히 해체돼 다시 시민과 대중의 품으로 돌아오는 일은 작품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는 한국 공공미술과 민중미술의 중요한 문화유산을 미래 세대에 온전히 전하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구의동 옛 우리은행 건물 속 오윤작가의 테라코타 벽화]
한편, 작품 보존기금 모금은 오는 8월 31일까지 예술인 플랫폼 ‘씨앗페’ 홈페이지 https://www.saf2026.com/funding/oh-yoon-terracotta에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