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 70년, 혈맹에서 전략동맹으로


올해 10월 1일은 건군 75주년 한미동맹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미동맹은 지난 70년 동안 국가안보의 핵심 축으로서 한반도의 안보는 물론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는 한편 우리나라가 전쟁의 폐허 속에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어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발 돋음 하는데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전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모범적이고 성공적으로 굳건하게 다져온 한미동맹 70년의 역사적 의의와 앞으로의 발전과제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 한미동맹의 근간 한미상호방위조약

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은 한미동맹의 근간으로서 1953년 10월 1일 조인되고 1954년 11월 18일 발효되었으며 상호방위를 목적으로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한국이 외국과 맺은 유일한 동맹조약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전문(前文)과 본문 6개조로 구성되어있으며 외부로부터의 무력 공격에 대한 공동방위 결의가 전문에 명시되어 있다.

이 조약의 체결배경을 보면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는 등 한국군은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낙동강까지 후퇴를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6월 30일에 미군이 참전함으로써 낙동강에서 교착되었던 전선은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10월 하순 압록강 하류까지 북진하였다.

그러나 이때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이 다시 점령되는 등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교착상태에 빠지자 1951년 6월부터 미국과 구 소련 간에 휴전이 제의되고 7월부터 유엔군과 공산군 간에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이승만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휴전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휴전회담이 계속되자 1953년 4월 휴전 반대 항의문을 트루만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한편 급기야 반공포로 2만 7000명을 석방하는 등 미국을 강하게 압박했다. 그러자 미국은 이승만에게 휴전조건으로 한미군사동맹 체결을 제안하였다.

이에 따라 1953년 6월 미국 대통령특사 로버트슨이 내한하여 외교적 절충이 시작되었고, 8월에 내한한 덜레스 미무장관과의 일련의 회담에서 한미방위조약에 대한 합의를 보게 됨에 따라 8월 8일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미 국무장관 사이에 가 조인이 이루어졌다.

이어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0월 1일 워싱턴에서 정식으로 조인되고 1954년 11월 18일 발효되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탁월한 협상력과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신의 한수’로 평가 받고 있다.

▣ 한미동맹의 역사적 의의

한미동맹의 역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의 한국 진주, 6.25 전쟁 시 179만 여명의 대규모 참전, 그리고 6.25 전쟁 직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한 한미동맹과 한미연합방위체제는 지난 70년 간 전쟁억지와 유사시 인계철선(Trip Wire) 역할을 해 왔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으며 특히 미 2사단은 북한의 군사도발 시 미국이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억제 수단으로 작용해 확실한 안전판 역할을 해 왔다는데 의의가 있다.

또 미국은 동맹국으로서 1953년부터 1970년까지 우리에게 약44억달러의 무상원조와 약 4억달러의 유상원조로 전후복구 및 한국경제 발전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경제성장의 기틀을 마련해주었으며 국군 20개 사단을 창설하여 무장할 수 있는 군사원조를 하였다, 이는 당시 한국이 사용하는 국방비의 87%에 해당하는 규모였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원조가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한미동맹은 지난 70년 동안 한국에 대한 외부의 위협을 억제하여 장기적인 평화를 유지함으로써 한국의 국가안보뿐만 아니라 동북아지역의 안정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양국 관계는 경제교류 및 민간협력 분야까지 확대되고 있으며, 한미동맹은 이제 단순한 군사동맹을 넘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면서 발전해나가고 있다.

▣ 한미동맹의 실체 주한미군과 한미연합사령부

한미동맹의 실체인 주한미군은 6.25전쟁 중 30만을 넘겼으나 휴전과 더불어 급격히 철수하여 1960년대 말까지 6만 여명이 한국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1971년 지상군 1개 사단과 1980년대 초 1개 여단 철수로 현재 약 2만8천여 명이 주둔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까지도 미국은 유사시 미 해군의 40%, 공군의 50%, 해병대의 70% 이상의 대규모 증원전력과 전략자산을 전개하도록 계획하고 훈련함으로써 한반도 안보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그 결과 1950년 6.25전쟁 이후 지난 70여 년 동안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또한 주한미군은 그 숫자에 비하여 막강한 전쟁능력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략적 정치적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억지력과 동북아의 안정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와 함께 1968년 1·21사태 및 푸에블로호 납북사건을 계기로 매년 한미 안보협의회의(SCM)와 한미군사위원회회의(MCM) 등을 설치해 개최하였고 이에 따라 1978년 11월 8일 연합방위체제의 실질적 운영주체로서 유엔군사령부를 해체하고 한미연합사령부(CFC)를 창설하였다.

이어 한미연합사령관은 미국인으로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행사하였으나 1994년 12월 1일부터 한국군이 평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함으로서 평시 작전통제권은 한국 합참의장이 행사하게 되었다.
지휘부인 한미연합사는 2017년 용산에서 평택으로 이전하여 세계 최대 규모(14,677Km2) 최첨단 시스템을 갖춘 캠프 험프리스에서 “오늘 밤 당장 싸운다(Fight tonight)”를 모토로 완벽한 연합방위태세를 갖추고 있다.

▣ 성숙한 동맹을 위한 발전과제

한미동맹은 발전을 거듭하여 이제 군사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분야를 망라한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지난 4월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을 국빈 방문하여 한미정상이 “한미동맹을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더욱 강화하겠다.”고 밝힌바 있다.

따라서 보다 굳건하고 성숙한 동맹관계를 위해 첫째, 동맹정신을 바탕으로 실행력을 높여나가야 한다. 북 핵에 강력히 대응하기 위한 실효적 조치인 ‘워싱턴 선언’과 북 핵 대응 협의기구인 핵 협의그룹(NCG)을 심도 있고 더 정교하게 운영하여 확실한 실행력을 확보해 나가야 한다.

둘째, 우리나라도 국제적 위상에 걸맞게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우리도 주변국들과의 ‘전략적 모호성’을 탈피하고 보편적 규범에 기초하여 명확한 입장을 취하고 일관성 있게 추진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에 맞게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성숙한 모습도 보여야 할 것이다.

셋째, 양국 간에 확고한 신뢰를 구축하고 결속력을 높이는 노력도 필요하다. 지난 70년 동안 한국근무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간 350만의 주한 미군과 그 가족들과의 친선 우호 관계를 증진하고 한미동맹이 탄생한 10월1일을 ‘한미동맹의 날’로 제정해 그날 하루만이라도 온 국민이 주한미군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확고한 신뢰와 든든한 동맹의 기반 위에서 현재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반드시 억제해 내야 한다. 지난 70년 동안 그랬듯이 또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70년의 역사도 동맹정신을 발휘하여 한미가 함께 성공신화를 써 내려가야 한다. 안보는 국민의 생존과 민족의 운명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안찬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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